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지쯔배 세계 바둑 선수권 대회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대회는 1988년 1회부터 해마다 열리며, 세계 각국에서 예선을 통과한 24명[* 제1회는 16명, 마지막인 2011년 24회는 32명 - 7개 지역구 예선을 거친 29명(대한민국 6명, 일본 13명, 중국 6명, 대만·북미·남미·유럽 각 1명)과 전 대회 3위내 입상자]이 단판승부를 통해 [[토너먼트(스포츠)|토너먼트]] 방식으로 우승자를 가리는 형식으로, 결승전도 단판승부이다. 경기룰은 생각시간 3시간에 1분 초읽기 10회[* 2002년 15회까지는 덤이 5집반이었지만 2003년 16회부터 한국처럼 6집반. 그리고 마지막인 2011년 24회는 생각시간 2시간에 1분 초읽기 5회.][* 이 형태는 바로 이전의 6시간에 육박하는 장기전 위주의 바둑에서 탈피하는 데 선구자 역할을 했으며, 훗날 하나둘씩 창설되는 바둑 세계 대회 룰의 본보기가 되어왔다.], 우승 상금은 1500만엔. 이는 20년간 같은 금액을 유지했다.[* 중간에 2000만엔으로 잠깐 인상시킨 적은 있었으나, 후원사의 재정 문제로 16회 때 다시 복구시키고 준우승 이하의 상금은 오히려 대폭 줄이기도 했다.] 1회 대회 당시 16명 중 한국 기사는 3명이 초대되었는데,[* 해당 기사는 당연히 [[조훈현]], [[서봉수]]가 발탁되었지만, 나머지 한명은 [[장두진]]이 선발되는 약간의 이변이 있었다.] 3명 모두 조기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으며 창설국 일본은 우승을 차지했다. 이후 5회 대회까지 일본 기사들이 우승을 독점했지만 6회 [[유창혁]]의 우승을 기점으로 한국 기사들이 포텐을 터뜨리기 시작. 5~24회까지 단 4번을 제외하고 한국이 우승을 쓸어담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. 우승자 연혁을 봐도 [[유창혁]], [[조훈현]], [[이창호]], [[이세돌]], [[박영훈(바둑)|박영훈]], [[박정상]], [[강동윤]], [[박정환(바둑기사)|박정환]] 등 쟁쟁한 한국 기사들이 번갈아가며 우승을 차지하는 식이었으니 어찌보면 한국 바둑의 전성기를 그대로 반영하는 기념비적인 기전이라고도 볼 수 있다.[* 한국 바둑의 전성기였던 1990년대, 2000년대 우승한 기사만 봐도 당시 한국 바둑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. 중국도 4번의 우승 기록이 존재하긴하나, 중국 바둑의 전성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2010년대 초반에 후지쯔배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한국만의 무대로 남아버리게 되었다.] 하지만 2011년 24회를 마지막으로 후지쯔배의 폐지가 공식적으로 발표되면서 최초의 바둑 세계 대회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.[[http://www.cyberoro.com/news/news_view.oro?div_no=12&num=516023|#]][* 마지막 우승자는 [[박정환(바둑기사)|박정환]] 九단. 박정환의 우승은 이세돌 이후의 세대교체를 알리는 사건이기도 했다.] 이전부터 후원사 후지쯔의 지속적인 경영 악화와 일본 바둑의 몰락으로 인해 어느 정도 예정된 수순이었지만, 무엇보다 [[도호쿠 대지진]]으로 직격탄을 맞은것이 큰 원인. 때문에 마지막 대회는 [[간사이]] 지방에서 32강 토너먼트를 5일 만에 속행시키는 등 차질이 많았다고 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